예전 VC 초년병 시절, 어쩔 수 없이 투자업체 사장님이나 아는 벤처기업 사장님들과 저녁 술 자리를 할 기회가 많았다. 처음엔 의례적인 접대성 식사 자리려니 생각했는데, 이제와 돌아보니 이분들에겐 그나마 내가 제일 편하게 하소연할 대상이었던 것같다.
지금처럼 젊은 친구들이 스타트업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IMF 이후 자의반 타의반 대기업에서 나와 벤처기업 창업하신분들도 많았고, 중년의 나이에 친구들과 의기투합 해 도전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기 혼자만의 문제 뿐 아니라, 중년 가장으로서의 무게감이 꽤 컸으리라.
특히 회사에 자금 문제, 영업 문제, 직원 문제가 생겨도 창업자로서 어디 쉽게 얘기할 곳이 없었겠더라.
당연히 회사에서 다른 임직원들에게 함부로 티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에 와서 자기만 바라보는 부인과 애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겠나. 친했던 학교 동창이나 지인들을 만나도 각자 다 다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속 깊은 자기 얘기를 할 수도 없고, 오히려 그들은 사장이라 돈 많이 벌겠다고 답답한 소리나 하고 있고.
그나마 지분 투자를 한 투자사 담당자는 같은 배를 탄 입장이라, 회사 문제를 얘기해도 처음엔 잔소리를 좀 듣더라도 나중엔 같이 걱정하고 대책을 논의할 수 있는 최적의 상대가 된다.
내 입장에선 실제 현장의 사업 얘기를 듣는 것도 흥미로웠고, 그러다 보니 문제 상황을 들으면서 화를 내기 보다는 같이 걱정하는 모드로 바뀌게 되었다.
한 두잔 들어가다 보면, 그래도 다시 한번 해보자고 의기투합을 하게 되고, 그렇게 2차까지 쫓아가면 노래인 지 비명인 지 모를 발악같은 한 풀이 공연까지 보게 될 경우도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만 연속으로 10번 부르신 XXX 사장님, 잘 살아계신가요?)
그렇게 속에 쌓인 '화'를 싹 비우고 나면, 다음 날 부턴 또 다시 전투 모드로 바뀌어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장렬히 전사하기도 하고, 일부는 살아남아 북진에 성공하기도 하고...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 옛날 오늘 같은 금요일 밤이면, 어느 빌딩 뒤 포장마차에서, 또 어느 공단 인근 술집에선 벤처, 중소기업 중년 사장님들의 하소연 섞인, 울음인 지 웃음인 지 모를 떠들석한 목소리가 많이 들렸었다.
그렇게 다들 긴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