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호선 플랫폼 위에 서다>
'ZERO100' 프로그램. 몇 달간 실무자들이 죽어라 준비해 여기 저기 홍보했지만, 정작 지원자를 기다릴 땐 솔직히 속으로 쫄렸다.
유명 엑셀러레이터의 투자업체 선발 프로그램도 아니고, 대기업에서 상금 주는 이노베이션 프로그램도 아니고, 어디 해외 답사가는 정부 프로그램도 아니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협력, 가치, 가능성, 기본, 커뮤니티 이런 원론적인 얘기나 하고 있으니, 내가 지원자라도 관심 없을 게 당연할 터.
그래서 주변 지인 찬스 써가며 여기 저기 추천을 부탁했지만, 첫날만 개업일 효과로 반짝했을 뿐 지원자수는 기대보다 미미했다.
당초 20~30명 정도 선발을 염두에 두고 기획을 했지만, 운영진 입장에선 현실적이 되야 했다.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는, 10~20명이라도 뽑아 소수 정예로 가는 것도 괜찮다며 애써 실망감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한국은 대입 눈치작전에 최적화된 DNA를 보유한 민족. 마감 하루 이틀 동안 양질의 지원자들이 무더기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마감시간을 놓쳤다고 추가 지원서 받아달라는 사람, 추가 설명자료도 보내겠다는 사람...
미달을 염려하던 학과가 마감일에 경쟁률 최고 학과가 된 셈이다.
경쟁률만 높으면 뭐하나, 평균 점수(지원자 됨됨이)가 낮으면 말짱 꽝. 그런데 차분히 전체 지원자들 지원 내용을 보고 개별 인터뷰를 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누구 하나 비슷한 배경과 스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미국 유학 후 건축설계사 하다가 F&B 꿈을 버리지 못해 식당 바닥부터 구르는 사람, 개도국 대학생들에게 코딩교육 시키며 자립의 꿈을 심어주는 팀, 중학생 때부터 직접 장사를 하며 창업의 꿈을 키우는 대학생, 학교 휴학하고 스타트업에서 바닥부터 배우고 있는 사람, 어릴 때부터 로봇에 빠져 산 로봇 외길 20년 전문가, 스타트업 맛을 못잊어 다시 돌아온 회계사, 아버지가 중국 공장에서 만들어 보내주는 제품을 판매하는 아들, 당장의 현금 마련을 위해 꽈배기까지 직접 만들어 팔아본 사람, 유명 액셀러레이터에서 스타트업들 가르치다가 직접 창업하려는 사람, 의료 스타트업 준비하는 현직 의사, 대기업과 다국적기업에서 일하다 멀리 멕시코에서 창업을 준비 중인 사람 등등...
너무 궁금했다. 이런 대단한 분들이 '왜' 우리 프로그램에 지원했을까? 그래서 설명해줬다. 우린 투자 해주는 것도 아니죠, 상금도 없지요, 정부 지원금도 없지요, 그저 줄 수 있는 건 비슷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 뿐일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말하고도 좀 애매했던 그 '가치 지향', '사람', '만남과 협력', '기본', 뭐 이런 게 마음에 들어 지원했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 역시 충격이었다. 진정성을 알아주길 원했지만 기대는 안했는데, 그런 진정성을 알아준 사람들이 있었다니...
반대로 뭔가 목적성을 가지고 지원한 분들 (스팩 쌓기, 투자자 연결 등)은 자연스레 걸러지고, 진정성이 보이는 분들만 남게 되었는데, 아뿔사 후보자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졌다.
선발자가 많아지면 예산 뿐 아니라 실무자들의 일도 왕창 늘어난다. 하지만 그대로 보내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는 분들이 많았다. (소개팅 후에 바로 느낌 온 건 아니지만, 한번은 다시 만나 얘기하고 픈 그런 상황)
그래서 최종 선발자를 두 배로 늘려 50명을 뽑았다. 세 달간 긴 여정 중에 자연스레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 줄고 줄어 혹 마지막 1명만 남더라도, 우리가 그 1명의 꿈이 발현되도록 도울 수있다면 그것으로 성공이다. 그 작은 불씨가 활화산으로 폭발할 수도 있으니...
우리의 의도도 그렇고, 참여자들이 바라는 바도 사람들과의 진정성 있는 만남이다. 우리는 최소한의 판만 깔아줄테니 본인들이 알아서 그 안에서 놀라고 했다.
우리는 전문 가이드가 붙어 다니는 해외여행 전문 팩키지 여행사가 아니고, 교통편과 호텔만 준비해 주는 호텔팩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기본 일정만 줄테니, 그 안에서 참여자들끼리 짝을 이뤄 알아서 세부일정을 짜라고 했다. 그러다 눈이 맞으면 여행이 끝나고 와서 썸 타다 결혼(공동창업)까지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혼(공동창업)을 목적으로한 짝짓기 프로그램은 진정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내가 이런 해외 호텔팩 여행을 처음 경험한 건 무려 30년 전인 1994년 8월, 역대 최고로 더웠다던 그 여름이었다.
한국이 막 국민소득 1만불을 돌파하네 마네 할 무렵, 3만불을 넘던 유럽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내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아,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정말 세계는 넓고, 보고 경험할 건 너무 많구나...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잠깐 공부했던 고시 참고서들은 다 갖다 버리고, 학교 밖으로, 한국 밖으로 나돌아다니기 시작해, 30년이 지난 지금, 아예 국적까지 바꾼 채 해외에서 온갖 종류의 세계인들과 다양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1994년 유럽여행에서 돌아와 축 처진 몸으로 집에 돌아가던, 후덥지근했던 그날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1호선 국철 플랫폼이 너무 허접하게 보였다. 선풍기 몇개만 돌아가던 땀에 쩔은 국철도 유럽 기차와 너무 대비되었다.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어제, 다시 그 1호선 플랫폼위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이제 국민소득 3만불의 선진국 한국 답게 플랫폼은 잘 정비되어 있고, 열차 안은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에어콘이 빵빵하게 나온다.
30년 전 내가 유럽 배낭여행에서 받았던 충격으로 인생의 큰 방향이 바뀌었던 것처럼, 어제 만난 50명의 ZETO(ZERO100 멤버)들도 이 ZERO100 여행이 인생의, 또는 창업의 큰 전환점이 되길 기원한다.
현실화가 어려운 너무 이상적인 프로그램으로 보였지만, 꾸준하게 처음 의도를 밀고 나가신 박희덕 대표님, 어제 부상 투혼으로 코칭해주신 Sky Cho 대표님, ZETO 브랜딩을 비롯해 물심양면으로 따뜻하게 도와주신 Byung Il Lee 벤처 파트너님, 최적의 장소를 제공해주신 이기대님, 참가자들 간식을 지원해주신 널담의 Hudson Jin 대표님, 무엇보다도 제로백 브랜딩부터 운영 총괄까지 하고 계신 미래 창업가 김하영 매니저님과 박선영 매니저님 등 모두에게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계속 업데이트 드리겠습니다.